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후원하는 문학잡지 월간 에세이 2021년 12월호 "재미난 수작(手作)"코너에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짧은 에세이 한편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식물예찬


출근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유 노동자가 느지막이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공간에서 키우고 있는 식물들이 얼마만큼 태를 달리했나 관찰하는 것이다. 간밤에 모두들 안녕했는가. 물은 충분하고 생기는 돌아왔는지 겉흙과 잎을 만져본다. 새로 들인 동백 화분 앞에 서서 아직 제철이 아닌 줄 알면서도 꽃이 피길 매일 기다리기도 한다. 잠에서 덜 깬 안개 가득한 정신으로 화분부터 돌진하여 안녕을 확인하는 이 의식(儀式)과도 같은 행위는 열 평 남짓한 공간 속에 종일 홀로 갇힌 기분을 지우고 내적 불안감을 잠재우는 과정이다.

자수가(刺繡家)로 자신을 소개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공간 연출을 기획하고 장식하는 디자이너(회사원)로 일했었다. 필드는 힙(hip)하고 예민한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피치(pitch)로 분주했었고, 계절은 늘 두, 세 시즌을 앞서느라 언제나 현실 시간의 땅에는 발붙이지 못하는 이방인 같았다. 숨 막히는 사람들 속 공기에서 벗어나 온전히 느린 속도로 현실의 시간에 내려앉은 지금의 나는 호흡을 고르며 홀로 고요한 작업가가 되어 돌보지 못했던 나와 내면의 세계에 더욱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수를 놓는 작업은 명상 혹은 수련과도 같은 행위인지라 부지런히 작은 땀을 이어야 하고 소란스럽지 않은 작은 동작으로 오 미리 씩 진전한다. 손톱 걸음의 속도만큼 이 고요한 수행은 느린 속도로 생장하는 내가 키우는 식물과도 닮아있다.

잎과 순을 한참 들여다보며 의식의 희미함이 거두어질 때 즈음엔 뜨겁게 내린 차와 함께 작업대 앞에 앉는데 다시 마주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자연이다. 실과 원단의 태생인 목화솜과 마 줄기 등의 소재뿐만이 아니라 두 손의 끝에서 바늘과 실로 엮여 태어난 꽃과 잎사귀들로서 말이다. 이쯤 되면 알 수 있듯이 내 작업의 영감이 되는 가장 큰 원천이자 뮤즈는 내 삶과 맞닿아 피부와 공기처럼 가까이하는 자연, 그중에서 녹색식물이다. 파랑은 벅참을 안기고 백색은 몽상을, 녹색은 상처 나고 지친 마음에 위로의 손길이 된다.

지난해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병환을 통보받고 짧은 그의 여생을 마주하며 절망과 슬픔 속에 갇혀버린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던현실에서 검게 탄 마음을 환기시키려고 무작정 걸었었다. 마을의 집마다 개인의 취향으로 큐레이션 된 정원수를 보고 그 주인을 상상했고, 길바닥과 담벼락에 그렇게 안온하지도 않은 척박한 틈새 사이로 말없이 버티고 있는 녹색 생명을 마주해야만 빛이 닿지 않던 마음에 겨우 온기가 들고 어둠이 누그러졌다. 길에서 마주치는 흔한 잎 들만이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한쪽 어깨에 올려지는 손바닥 무게만큼 위로를 받았다.

그 위로에 나만의 방식으로 보은하고 싶었고, 이은 여름에 작은 공간에서 가졌던 개인전 ‘하시(夏詩, summer poem) ;여름에서 읊조리는 말들’을 통해 나를 안아주었던, 애착 하는 녹색 식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전시에서 보인 ‘시들지 않는 식물의 형상(2020~)’ 시리즈는 그해 여름에 먹던 살구와 포도알의 형태를 알알이 본뜨고 순백의 잎에 수를 놓아 당시 애틋했던 기억과 감정을 기록하여 그들에게 영원을 헌정한 작업이다. 생명이 진 끝에 소멸하는 것이 아쉬워 그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빛나는 생기를 박제하듯 수를 놓는 행위를 통해 남겼다. 나의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손끝이 헤질 만큼 빚은 작은 땀을 묵고 엮은 풀(草)로 이룬 것이다.

생명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깨진 그릇을 수선하여 새로운 삶을 입히는 킨츠키와 꽃과 가지를 조형적으로 꽂아 소우주를 구현하는 이케바나 모티브의 작업등 자연을 넘어 생명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 세계가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공간은 살아있는 녹색 식물들과 시들지 않는 식물들, 새로 생명을 얻은 존재들이 공존하여 하나의 조화로운 정원이 되어간다.

오늘도 그 정원속에서 안녕, 나의 푸르고 빛나는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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